벽에 줄지어 꽂아 둔 종이 카드와 사진들

전투는 이기고 전쟁은 졌습니다

사례 29 : 어린이 드론 아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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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잘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오늘은 제가 놓친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그런데 흔한 실패담이 아니라, 잘 팔렸는데도 실패한 이야기입니다.

01

빈 칸을 찾았습니다

입문용 드론은 있는데
어린이 드론이 없었습니다

어린이 드론 아파치라는 제품을 판매한 적이 있습니다.

먼저 시장조사를 해보니 드론 시장은 두 가지 축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드론 시장의 두 축

조종 난이도
입문자용 ↔
숙련자용
×
용도
완구용 ↔
항공촬영

이 중 입문자·초보자 시장이 제법 컸습니다. 그런데 검색해서 나오는 제품이 죄다 어른 대상이었죠.

여기서 생각이 하나 들었습니다. 남자아이들도 드론을 좋아하지 않을까. 로봇과 공룡을 좋아하는데, 드론이라고 안 좋아할까요.

그래서 네이버 트렌드에서 확인해보니 결과가 이랬습니다.

입문용 드론검색되는 시장이 있다이미 붐빔
어린이 드론시장 자체가 없다빈 칸

이게 중요합니다. 시장은 있는데(입문자), 그 이름의 칸은 비어 있었습니다(어린이 드론).

02

이름이 컨셉을 실었습니다

약점이
강점이 됐습니다

마침 제가 팔 아파치 드론은 경쟁사에 비해 스팩이 부실했습니다. 성능표로만 보면 밀리는 제품이었죠.

그런데 직관적이고 간단하게 설계돼 있어서 조종이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어떤 드론보다도 핸들링이 간편했죠.

어른 기준으로는 약점이지만, 아이 기준으로는 강점입니다. 어려운 기능이 없는 게 아이에겐 딱 맞으니까요.

그래서 「어린이 드론」이라는 컨셉을 입히고, 이름을 「어린이 드론 아파치」로 지었습니다.

이름을 보는 순간 누가 쓰는 물건인지, 뭐가 다른지가 한 번에 옵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이름이었죠.

결과는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5월까지 대박이었고, 특히 어린이날에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완구는 시즌이죠. 빈 칸을 찾았고, 이름을 잘 지었고, 어린이날을 맞췄습니다. 여기까지가 전투입니다. 그리고 전투는 이겼습니다.

03

그런데 여기서 멈췄습니다

다음 나무를
안 심었습니다

사실 이 시장엔 훨씬 더 큰 드론 1위 업체가 이미 있었습니다. 경쟁사 제품이 워낙 좋았고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건의했습니다. 아파치의 성공을 발판 삼아, 아이들이 갖고 놀 완구 드론을 집중적으로 개발해서 카테고리 리더가 되자고요.

한 칸을 뚫었으니, 그 칸을 라인업으로 채워 자기 것으로 만들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조언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마케팅을 맡았고, 다음 제품 개발까지는 제 손이 닿지 않았거든요.

결국 단발적인 성공에 그쳤습니다. 다음 도미노가 쓰러지지 않았고, 브랜드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1번

아파치
넘어뜨렸다

2번

다음 제품
세우지 않았다

3번

브랜드
오지 않았다
04

앞 편들과 겹쳐 보십시오

라바는 옮겼고
아파치는 안 옮겼습니다

앞에서 라바 이야기를 했죠. 칼라마법사가 통하니까 번개카로 옮기고, 빨대로 옮기고, 씨앗 하나에서 나무를 여러 그루 키웠다고요.

아파치는 정확히 그 반대입니다. 씨앗 하나를 심어서 열매까지 거뒀는데, 옆에 나무를 안 심었습니다.

같은 히트, 다른 그다음

라바
한 번 통하자
여러 개로 늘렸다
아파치
한 번 통하고
거기서 멈췄다

그리고 딤채 이야기도 했습니다. 한 칸에 깃발을 꽂았으면 라인업을 갖춰서 그 자리를 사수하라고요.

아파치는 깃발은 꽂았는데 라인업이 없었습니다. 어린이 드론이라는 칸을 열어놓고, 그 칸을 지킬 다음 제품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이건 마케팅이 진 게 아닙니다. 마케팅은 이겼고, 진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히트 하나로 끝나면
전투만 이긴 겁니다.

한 번의 대박은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거기서 멈추면 남는 건 "한때 잘 팔렸던 제품" 하나뿐입니다.

05

대표님 차례입니다

대박 다음날이
진짜 시작입니다

대표님께는 오히려 이 실수를 피하기 쉬운 이유가 있습니다. 개발도 판매도 직접 하시니까요.

제 경우는 마케팅만 맡아서 다음을 못 밀었지만, 대표님은 다음 제품을 낼지 말지를 직접 정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히트 상품이 하나 나오면 기뻐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다음 날 물으셔야 합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옆에 뭘 심을 것인가. 같은 컨셉의 다른 상품, 같은 고객의 다른 필요. 뭐라도 하나 더요.

그걸 안 하면 아파치처럼 됩니다. 잘 팔렸던 기억만 남고, 브랜드는 안 되죠.

오늘 하실 건 하나입니다. 지금 제일 잘 나가는 상품 옆에, 다음에 심을 나무 한 그루를 적어보십시오.

아직 안 만들어도 됩니다. 그 한 줄이 있느냐 없느냐가, 전투로 끝날지 전쟁까지 갈지를 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