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을 아무리 살펴봐도 차별화 포인트가 하나도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제 경험상 드물지만, 없는 것도 아니죠.
지난 화에서 다룬 히터와 에어컨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그때 「선점」이라는 기법을 꺼냈지만, 어디서 온 건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그 원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 기법은 제가 발명한 게 아닙니다. 현대 광고의 아버지라 불리는 클로드 홉킨스가 100년도 더 전에 선보였고,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죠.
다만 선점은 아무 때나 꺼내는 카드가 아닙니다. 차별화에는 순서가 있고, 이건 맨 마지막에 꺼내는 수단이거든요.
1순위 · 발명
없던 차별점을 처음부터 만든다. 시장조사와 상품 전문분석으로. 경쟁우위가 있으니 마케팅도 편하고 판매량도 잘 나온다.
2순위 · 발견
이미 있는 차별점을 찾아낸다. 없는 걸 만드는 게 아니라. 제품력이 조금 부족해도 어떤 컨셉으로 보이게 하느냐로 간다.
최후의 보루 · 선점
찾아봐도 차별점이 하나도 없을 때. 다들 갖고 있는데 아무도 말 안 하는 걸 먼저 말한다.
모든 제품에는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당연해 아무도 강조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을 먼저 강조해 우리 제품이 경쟁우위를 가진 것처럼 인식을 심는 겁니다. 이걸 선점의 차별화라고 합니다.
모든 제품에 하나쯤 있다는 겁니다. 대표님 상품에도 있습니다.
맛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맥주는 차별화하기 힘든 대표적인 아이템입니다. 가격대와 품질이 비슷비슷한 맥주들 사이에서는 솔직히 그 맥주가 그 맥주처럼 느껴지죠. 결국 소비자는 친숙한 브랜드를 사거나 가장 싼 맥주를 찾게 됩니다.
만들 것도, 찾을 것도 없는 상품이었습니다. 그래서 홉킨스는 마지막 수단을 꺼냈죠. 슐리츠 맥주 캠페인을 기획하면서 맥주의 맛을 한 줄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술병을 고압 증기로 깨끗하게 씻어낸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중요하죠.
맥주를 맛으로 견주면 다 비슷비슷해서 안 갈립니다. 그런데 슐리츠가 「위생」이라는 새 잣대를 꺼내자, 소비자는 그 잣대로 맥주를 다시 봤습니다.
병을 씻는다고 말한 슐리츠는 깨끗한 쪽, 아무 말 없는 나머지는 그렇지 않은 쪽. 이렇게 미국 맥주 시장이 위생적인 맥주와 비위생적인 싸구려 맥주로 양분된 것입니다.
그러니 슐리츠는 기존 시장에서 순위를 올린 게 아닙니다. 겨루는 잣대 자체를 맛에서 위생으로 바꿔서, 시장을 둘로 가르고 자기가 선 쪽을 좋은 쪽으로 만든 겁니다.
대중은 고압 증기로 병을 세척하는 슐리츠를 깨끗하고 위생적인 맥주의 선두주자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겁니다.
5위
캠페인 전 · 맥주 시장
1, 2위
캠페인 후 · 업계를 다투는 대기업
그런데 재밌는 사실이 있습니다. 고압 증기로 맥주병을 깨끗하게 씻어내는 건 슐리츠만의 전매특허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맥주회사가 똑같이 병을 살균했고, 맥주 업계에선 그게 당연한 일이라 아무도 강조하지 않았을 뿐이죠.

맥주를 사서 먹기만 하는 소비자 대부분은 맥주 제조공정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강조하지 않는 특장점을 먼저 강조한 슐리츠는, 소비자 인식 속에서 위생적이고 깨끗한 맥주라는 자리, 곧 포지션을 선점하게 됐습니다.
앞에서 이걸 선점의 차별화라고 불렀는데, 홉킨스가 붙인 원래 이름은 「선제적 리즌 와이」입니다. 리즌 와이(reason why), 곧 「사야 할 이유」를 남보다 먼저 말한다는 뜻이죠. 경쟁제품 모두에 있으나 아무도 강조하지 않은 특징을 선수 쳐서 강조함으로써, 내 제품만의 것처럼 인식을 선점하는 겁니다.
이름이 곧 광고입니다
이 기법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마침 맥주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맥주와 궁합이 좋은 치킨 이야기를 해볼까요?
대한민국의 치킨 매장 수는 전 세계 맥도날드 매장보다 많다고 하죠. 치킨 공화국이라는 별명답게 유명한 프랜차이즈가 많고, 브랜드마다 컨셉이 하나씩 있습니다.
KFC
처음으로 프라이드 치킨 시장을 열었다
페리카나
처음으로 양념치킨을 널리 보급했다
교촌
간장양념으로 차별화했다
BBQ
올리브 기름으로 차별화했다
호식이 두 마리
1마리 값에 2마리를 준다는 저렴한 가격을 내세웠다
이처럼 치킨 프랜차이즈도 저마다 차별화된 컨셉이 있기에 치열한 레드오션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경쟁자가 새빨갛게 몰려 서로 물어뜯는 시장 말입니다.
여기에 뉴페이스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60계 치킨입니다. 매일 새 기름을 쓰고, 한 기름통에 치킨 60마리를 튀기면 바로 교체합니다. 이름이 곧 그 말이죠. 60계, 60마리.

그런데 이 한마디가 왜 그렇게 잘 먹혔을까요? 치킨을 튀기는 기름은 위생과 건강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거든요. 특히 부모님이 아이에게 치킨을 사줄 때는 오래된 폐유로 튀기지 않을까 걱정하기 마련이죠. 60계는 이 심리를 잘 파고들어 차별화에 성공해 무사히 시장에 안착했습니다.
그런데 이 차별화도 선제적 리즌 와이입니다. 슐리츠 맥주처럼, 사실 다른 치킨 프랜차이즈도 치킨을 60마리 튀기면 기름통을 교체한다고 하거든요.
18리터 기름에 닭을 50~60마리 정도 튀기면 기름이 산패유로 변하거든요. 오래 써서 산패한, 그러니까 상해버린 기름입니다. 껍질에 까맣게 탄 자국이 묻어나오고 살에도 탄 맛이 뱁니다.
업계에선 당연한 일입니다. 치킨을 직접 여러 마리 튀겨봤거나, 그런 이에게 얘기라도 들어봤거나. 이런 업계 사람이 아니고서는 일반 소비자가 이걸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모든 치킨 프랜차이즈가 기름을 잘 교체하는데도, 마치 60계 치킨만 깨끗하고 위생적인 브랜드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먼저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기까지는 슐리츠와 같습니다. 그런데 60계는 두 개를 더 붙였습니다.
말한 것 · 선점
60마리를 튀기면 기름을 간다.
장치 ① · 안 갈 이유를 없앤다
치킨이 많이 안 팔리면 전날 쓴 기름을 재사용하고 싶기 마련이다. 이를 막기 위해 본사에서 날마다 기름 1통을 무료로 제공한다고 합니다.
장치 ② · 지키는 걸 보여준다
정말로 60마리만 튀기고 교체하는지 체크하려고 앱으로 매장마다 주방 CCTV를 늘 열어둔다고 합니다.


선점한 말은 경쟁사가 내일이라도 따라 쓸 수 있습니다. 상세페이지에 「우리도 60마리마다 갑니다」라고 적으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기름값을 본사가 대는 건 돈이 들고, 주방을 상시 공개하는 건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말은 따라 쓸 수 있어도 이 둘은 따라 못 하죠.
없는 걸 지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선점이든 장치든, 그 밑에 깔린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두 사례 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슐리츠는 정말로 병을 살균했고, 60계는 정말로 기름을 갈죠. 다만 다들 하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여기에 넘으면 안 되는 선이 하나 있습니다. 이 기법을 만든 홉킨스부터가 그 선을 자주 넘나든 사람이거든요. 실제로 그는 캠페인을 성공시키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윤리적으로 비판도 많이 받았습니다.
기법은 빌려 쓰되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제대로 지켜야 합니다. 안 하는 일을 한다고 적으면 그건 선점이 아니라 거짓말이니까요.
여기까지가 두 사례입니다. 대표님 것으로 옮기면 이렇게 됩니다.
1단계 · 선점할 것
지금 하고 있는데 상세페이지에 안 적은 것을 하나 고릅니다.
2단계 · 사실 확인
그게 정말 매번 지켜지는지 확인합니다. 가끔 빠진다면 적으면 안 됩니다.
3단계 · 장치 ①
안 지킬 이유를 없앱니다. 60계는 본사가 기름값을 댔다고 합니다.
4단계 · 장치 ②
지키는 걸 보여줍니다. 60계는 주방을 열었다고 합니다. 사진 한 장이면 됩니다.
2단계에서 걸리는 게 많으실 겁니다. 그럼 그건 후보에서 빼시면 됩니다. 지킬 수 있는 것만 적어야 하죠.
그 말, 내일도 지킬 수 있습니까?
먼저 말하는 건 하루면 됩니다. 어려운 건 그다음이죠. 60계가 기름값을 대고 주방을 열었다고 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어디에 적느냐는 다음 문제입니다. 상품명일 수도 있고, 상세페이지 맨 위일 수도 있죠. 먼저 정할 건 무엇을 말하느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