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연재 · 24화 · 칼라마법사 · 실리콘 클레이

이미 하는 데가 있다고 거절당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두 문장을 말했고, 9월에 계약, 11월에 출시, 12월 말에 대박이 났습니다.

아이들 장난감을 팔 일이 많다 보니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빌려온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칼라마법사라는 제품인데, 온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실리콘 클레이였습니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라바>의 캐릭터를 입혔는데, 그 캐릭터를 빌려오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01

문 앞에서 막혔습니다

이미 하는 데가
있다고 했습니다

라바 제작사인 투바앤을 찾아가 라이센스 제휴를 요청했습니다.

소재와 궁합이 잘 맞으니 꼭 캐릭터를 활용하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돌아온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이미 라바 클레이를
만드는 업체가 있는데요."

거절 사유가 명확합니다. 겹친다는 겁니다. 여기서 대부분 돌아섭니다.

보통은 여기서 끝나죠. 이미 있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거절에는 전제가 하나 깔려 있습니다. 내 제품과 그 업체 제품이 같은 칸에 있다는 전제입니다.

그 전제를 건드리면 됩니다.

02

첫 번째 문장

그냥 클레이가
아닙니다

그렇게 설득에 나섰고, 첫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문장

"우린 그냥 클레이가 아니라 실리콘 클레이라서
카테고리가 겹치지 않는다"

보십시오. 거절 사유를 반박한 게 아닙니다. 거절 사유가 성립하는 칸 자체를 다시 그린 겁니다.

상대는 클레이라는 칸을 보고 있었고, 저는 실리콘 클레이라는 칸을 새로 꺼냈습니다.

상대의 칸라바 클레이 · 이미 있다겹친다
내가 그린 칸라바 실리콘 클레이 · 아직 없다안 겹친다

이게 소비자에게 쓰던 논리인데, 큰 키워드에서 이기지 못할 때 좁은 키워드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점은 하나뿐입니다. 그 논리를 소비자가 아니라 상대 회사에 썼다는 것.

다만 이건 말장난이면 안 됩니다. 실제로 소재가 달랐고, 그래서 만들어지는 물건이 달랐으니까요. 없는 차이를 지어내면 그 자리에서 들통납니다.

03

두 번째 문장

화나면
빨개지지 않냐

첫 문장으로 문은 열었지만, 열었다고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안 겹친다는 건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 허락할 이유가 있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두 번째 문장이 필요했습니다.

두 번째 문장

"너네 라바가 화나면 빨개지지 않냐?
우리는 그걸 똑같이 구현할 수 있다"

이 문장은 내 제품 자랑이 아닙니다. 상대 캐릭터의 특징을 짚고 있죠.

온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실리콘. 화가 나면 빨개지는 캐릭터. 이 둘이 겹치는 자리가 있습니다.

겹치는 자리

내 제품
온도로
색이 변한다
∩
라바
화나면
빨개진다

손에 쥐면 빨개지는 라바

여기가 중요합니다. 내 제품에도 있고 상대에게도 있는 것을 찾은 겁니다.

이걸 연결고리라고 부르는데, 캐릭터를 빌려오려면 제품을 보고 그 캐릭터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연결고리가 없으면 캐릭터를 붙여도 스티커에 그칩니다. 반면 연결고리가 있으면 캐릭터가 제품의 기능을 설명해 줍니다.

04

그래서 어떻게 됐나

9월에 계약하고
12월 말에 터졌습니다

두 문장으로 라이센스를 얻었고, 그다음은 빨랐습니다.

9월

라이센스
계약 취득

11월

출시
대대적 마케팅

12월 말

대박
1년 30억

이 제품 하나로만 1년에 30억 매출을 올렸습니다.

날짜를 다시 보십시오. 12월 말입니다. 완구는 크리스마스에 팔리니, 9월 계약은 그 일정에 맞춘 겁니다.

거절당한 자리에서 물러났다면 그해 크리스마스는 없었습니다. 다음 기회는 1년 뒤였고요.

05

캐릭터가 하는 일

아이들은 우리 제품을
모릅니다

왜 이렇게까지 캐릭터에 매달렸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이렇습니다. 중소기업이 만든 '온도에 따라 색이 변하는 실리콘 클레이'를 사람들이 얼마나 사주겠습니까.

아이들이 칼라마법사는 몰라도 라바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래서 신제품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랐죠.

라바는 아이와 학부모 중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머릿속에 한층 더 쉽게 자리를 잡습니다.

여기서 짚을 점이 있습니다. 알아보는 쪽은 아이입니다. 돈은 부모가 내지만, 캐릭터를 알아보는 건 아이니까요.

덤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제품을 넘어 캐릭터를 소유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만족도가 높아집니다.

그러면 가치가 올라가고, 결과적으로 객단가가 오르며 반품은 줄어듭니다.

같은 물건인데 더 비싸게 팔리고 덜 돌아온다는 뜻이죠.

06

대표님 차례입니다

빌릴 게
캐릭터만은 아닙니다

캐릭터 라이센스는 아무나 딸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저 역시 거절부터 당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신 두 문장은 캐릭터에만 쓰는 게 아닙니다.

납품처든 공동구매든 입점 제안이든, 거절당하는 이유는 대개 하나입니다. "이미 비슷한 데가 있어서요."

그때 확인할 것이 둘 있습니다.

첫째상대가 그린 칸이 진짜 내 칸이 맞나겹치나
둘째상대가 가진 것 중에 내가 살려줄 수 있는 게 뭔가연결고리

둘째가 어렵습니다. 대개 내가 뭘 얻을지만 준비해 가니까요.

하지만 정작 통한 것은 상대 캐릭터의 특징을 짚어준 문장이었습니다. 내 제품 얘기가 아니었죠.

거절은 대개 칸을
잘못 잡아서 옵니다.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나를 남과 같은 칸에 넣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칸을 다시 그리면 답이 달라집니다.

오늘 하실 일은 하나입니다. 최근에 거절당한 제안을 하나 떠올려보십시오.

그때 상대가 뭐라고 했는지, 그리고 그 말에 깔린 전제가 무엇이었는지 적어보시면 됩니다.

엠케터 전준혁

단종의 결단

잘 팔리던 걸 접은 까닭

한 번 뚫은 판을 다른 상품으로 옮겨 키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스타벅스가 따라오자 스스로 판을 접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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