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툼 브랜드 매니저를 하면서 가장 팔기 힘들었던 제품이 있는데, 바로 히터와 에어컨입니다.
이 두 제품은 아무리 애를 써도 당최 차별화의 실마리가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히터는 따뜻해지려고, 에어컨은 시원해지려고 삽니다. 여기서 더 어떻게 판로를 뚫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대부분의 소비자는 대기업 브랜드를 사거나 가장 저렴한 제품을 삽니다. 이름값도 최저가도 아닌 제 제품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습니다.
사례 1 · 바툼 카본히터
쓸 수 있는 수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 마지막 수가 이겁니다. 제품을 못 바꾸면, 인식을 먼저 차지하는 겁니다. 광고의 아버지라 불리는 클로드 홉킨스가 쓰던 「선점」이라는 기법이죠.
이건 차별화가 하나도 안 보일 때 꺼내는 마지막 수단입니다. 제품이 정말 다르다면 그걸 말하는 게 먼저지만, 히터와 에어컨은 그게 없어서 여기까지 밀려온 겁니다.
그래서 제품 말고 인식을 봤습니다.
이론 · 선점의 차별화
다 아는 사실을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어떤 인식을 먼저 선점하면 판매에 유리해지는가, 이걸 찾아봤습니다. 걸러낼 조건은 세 가지였죠. 업계에선 너무나 당연한데, 소비자는 모르고, 경쟁사도 아직 안 써먹은 것.
선점이 되려면 세 개가 다 맞아야 한다
다 아는 사실
들어본 적 없음
안 적혀 있음
하나라도 빠지면 선점이 안 됩니다. 고객도 아는 사실이면 새롭지 않고, 경쟁사가 이미 써놨으면 늦은 거니까요. 세 번째 칸이 제일 중요합니다. 앞의 둘은 제품을 보면 알지만, 세 번째는 경쟁사 상세페이지를 일일이 열어봐야 압니다.
적용 · 키워드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히터에서 찾은 건
전기세였습니다
히터를 놓고 이 셋을 맞춰봤는데, 실마리는 엉뚱한 데서 왔습니다. 여름이었습니다.
흔히 여름철 에어컨 전기세 폭탄을 걱정하죠. 이걸 난방용품에도 응용할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키 카피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겨울에도 여름철 에어컨
비용만큼 내시겠습니까?"
떠오른 걸로 끝내지 않고 확인했습니다. 네이버 키워드 검색량을 찾아보니, 겨울이 되면 '전기히터 전기세' 관련 검색이 늘고 있었죠. 매출 키워드를 찾아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갔습니다. 검색량은 몇 명이 찾는지까지만 알려주고, 왜 찾는지는 안 알려주죠. 그래서 그 키워드로 올라온 블로그 포스팅을 읽었습니다.
키워드 하나를 타고 들어간 순서
겨울에 늘어난다
올라온 글을 읽는다
여기 적혀 있다
"보일러를 틀기에는
돈도 아깝고 죄책감이 드는 것이죠."
가족이 모두 나가고 혼자 집에 남았을 때 이야기입니다. 내 한 몸 따뜻해지자고 집 전체를 데우는 게 걸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잠깐 히터로 몸을 녹이다가, 가족들이 저녁에 모두 귀가하면 다시 보일러를 틉니다.
검색량을 보고 들어갔는데 죄책감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이 찾는 건 따뜻함이 아니라 보일러를 안 틀어도 되는 명분이었습니다.
전환 · 아무도 안 쓴 것
숫자만 적지 않고
화면째 가져다 붙였습니다
그럼 그 명분을 어떻게 줄까요. 보일러 대신 히터를 켜도 돈이 거의 안 든다면, 굳이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그 '돈이 안 든다'를 눈앞에 보여주면 됩니다. 실제로 오픈마켓 상품평을 봐도, 사람들은 하나같이 충분한 난방과 저렴한 전기세를 찾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한국전력 홈페이지에 들어가 전기요금 체험관에서 한 달 전기세를 조회한 화면을 캡처해 상세페이지에 넣었습니다.
화면째 넣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입력한 조건이 같이 보여야 고객이 직접 따져볼 수 있으니까요. 숫자만 덩그러니 있으면 믿기 어렵지만, 계산기 화면이 붙어 있으면 다릅니다.
그런데 이 근거에는 바툼만의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300w 전기히터라면 어느 것이나 전기세는 똑같이 쌌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경쟁사들은 아무도 상세페이지에 전기세를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비자들은 바툼 카본히터를 저렴한 전기요금의 가성비 전기히터로 인식했습니다.
겨울 시즌
2,945개 판매 · 3억 원 이상
제품은 그대로였습니다. 성능도 그대로였고, 원가도 그대로였죠.
바꾼 건 상세페이지에 무엇을 적느냐 하나였습니다.
사례 2 · 바툼 이동식 에어컨
이번엔
실외기였습니다
같은 기법을 에어컨에도 썼습니다. 바툼 카본히터가 전기세를 선점했다면, 바툼 이동식 에어컨은 실외기를 선점했습니다.
보통 가정에서는 실외기를 밖에 두고, 거실엔 스탠드형, 방엔 벽걸이형을 설치합니다. 기존에 쓰던 에어컨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 보니, 사람들이 이동식 에어컨을 구매할 때도 실외기를 의식하더군요.
이론 · 걱정은 어디서 오나
제품에 없는 문제를
고객이 가져옵니다
이동식 에어컨은 주로 실외기를 건물 외부에 달 수 없는 사람들이 찾는데, 이때 실외기 없이 어떻게 열을 외부로 배출하나 걱정합니다.
이 걱정은 제품이 만든 게 아닙니다. 예전에 쓰던 에어컨의 기억이 만든 겁니다.
그래서 상세페이지만 들여다봐선 안 나오고, 고객이 예전에 뭘 썼는지를 떠올려봐야 나옵니다.
그렇게 찾아낸 걱정을 상세페이지에서 실외기 내장형이라고 먼저 말해주면, 그 망설임이 사라집니다.
두 제품이 한 일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밝힐 게 있습니다. 사실 모든 이동식 에어컨은 실외기 내장형입니다. 제 것만 그런 게 아니었죠.
저는 그걸 화면에 적었을 뿐이고, 경쟁사는 안 적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소비자 눈에는, 실외기 내장형이 제 에어컨밖에 없어 보였습니다. 전부 내장형인데도, 화면에 적은 건 저 하나뿐이었으니까요.
여기까지가 에어컨 이야기입니다. 두 제품이 한 일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습니다.
둘 다 없던 장점을 만든 게 아닙니다. 이미 있는데 아무도 말 안 하던 걸 먼저 말했을 뿐이죠. 그래서 이 기법은 돈이 안 듭니다. 공장에 전화할 일도, 금형을 바꿀 일도 없고요.
다들 가진 걸 먼저 말하는 순서가 이겁니다.
3단계를 거치면 후보가 대부분 탈락합니다. 경쟁사가 이미 적어놨다는 뜻이니까요. 그래도 됩니다. 하나만 살아남으면 충분합니다. 카본히터도 전기세 하나였고, 에어컨도 실외기 하나였죠.
"업계에선 당연한데
고객은 모르는 게 뭔가?"
파는 사람에게 당연한 것일수록 상세페이지에서 빠집니다. 너무 당연해서 적을 생각을 안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사가 안 적었다는 건, 경쟁사도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는 뜻입니다. 파는 사람끼리 다 같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일수록 아무도 안 적어놓습니다. 먼저 적으면 그게 내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