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B 충전식에 크기가 아담해 들고 다니면서 쓰는 휴대용 미니 가습기를 팔았습니다.
몸집이 작은데도 분무량이 풍성하고, 필터 교체 방식이라 위생적이고, 세척도 간편했습니다. 사무실, 침실, 주방, 자동차 안 어디에서도 쓸 수 있었습니다.
쓸 수 있는 자리가 많다는 건, 노려볼 시장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죠. 그래서 장소마다 사람들이 뭐라고 검색하는지 키워드를 조사했더니 이렇게 나왔습니다.
제품 하나가 품고 있던 시장
사무실 가습기 · 침실 가습기 · 주방 가습기
자동차 가습기 · 미니 가습기 · 휴대용 가습기
제품 1개가 총 6개의 시장에 진출할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것이죠.
여섯 곳에 다 들어갈 수는 없으니, 하나를 골라야 했습니다.
가고 싶던 곳
컨셉이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6개 가운데 제가 가장 눈독 들였던 땅은 미니 가습기 시장이었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제품의 컨셉과 시장의 수요가 딱 맞아 떨어졌으니까요. 들고 다니는 작은 가습기를 파는데, 사람들이 찾는 말도 '미니 가습기'였습니다.
더 알아보려고 네이버에서 하나씩 조회해봤습니다. 제법 시장규모가 컸고, 그만큼 경쟁자들도 많았습니다.
정확히 적어보면 이랬습니다.
등록 제품 수는 곧 경쟁자 수이고, 그 키워드로 이미 자리 잡은 상품이 14만 3천 개라는 뜻이죠. 블로그 글 수는 이미 깔린 콘텐츠입니다. 수많은 판매자와 체험단이 이 키워드를 두고 글로 싸워온 흔적이라, 새로 들어가면 그 아래에 묻히기 쉽습니다.
등록한다고 아예 안 팔리지는 않겠지만, 워낙 강자들이 즐비한 시장이었기에 투입하는 광고비 대비해서 큰 재미를 보기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접었습니다.
간 곳
등록 상품이 4분의 1인
시장으로 갔습니다
접었으니 이길 수 있는 다른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큰 마케팅 비용을 들이지 않더라도 확실하게 점령할 수 있는 전장을 찾아, 카테고리를 좀 더 좁혔습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차량용 가습기 시장이었죠.
솔직히 큰 시장은 아니었습니다. 차량용 가습기 키워드는 한 달에 3,000번쯤 검색됐죠. 썩 크지는 않아도 수요는 분명히 있는 시장이었습니다.
두 시장을 나란히 놓으면 이렇습니다.
등록 상품이 4분의 1 수준인 데다 제품 라인도 다양하지 않아 파고들 틈이 많았습니다. 블로그 글은 6분의 1이었고요.
그래서 확신이 들었죠. 미니 가습기 시장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겠지만, 차량용 가습기 시장에 진출하면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겠다.
옛말로 치면 용의 꼬리 대신 뱀의 머리를 잡은 겁니다. 큰 시장(용)에서 존재감 없는 꼬리로 남느니, 작은 시장(뱀)에서 눈에 띄는 머리, 곧 1등이 되는 쪽이죠. 여기선 미니 가습기가 용, 차량용 가습기가 뱀이었습니다.
그다음
뱀의 머리는
종점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시장 이야기로 끝날 뻔했는데, 그다음이 있었습니다.
등록이 4분의 1이라 적은 광고로도 상위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초기 비용을 크게 들이지 않고 차량용 가습기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했고, 그러면서 충분히 많은 판매량과 상품평을 쌓았습니다.
그 판매량과 상품평이 다음 단계의 밑천이 됐죠. 이를 기반으로 이 제품이 차량용 가습기뿐 아니라 '다른 가습기도 된다'는 식으로 키워드를 넓혀 매출을 올렸습니다. 소비자 머릿속에 '차량용 가습기 하면 이 제품'으로 먼저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요.
아까 그 상품명을 다시 보시면 됩니다. 바툼 다음이 차량용이고, 그 뒤로 미니·소형·원룸·사무실용·탁상용·초음파가 줄줄이 붙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저렇게 쓴 게 아니라, 하나 점령하고 옆으로 넓힌 겁니다.
뱀의 머리를 잡는다는 건, 손에 넣기 쉬운 성부터 점령해 군사와 식량을 보충한 다음 다른 성으로 원정을 나가는 정석 플레이죠.
다만 하나 밝힐 게 있습니다
원칙이라서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작게 시작해라"가 교훈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사실 가습기는 바툼 브랜드의 주력 상품은 아니었습니다.
가습기 말고도 마케팅에 힘을 쏟아야 할 제품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가습기는 용을 노리기보다는 뱀의 머리를 점령한 선에서 멈추고, 더는 카테고리를 넓히지 않았습니다.
반면 같은 바툼의 바디드라이어는 주력 상품이었습니다. 기존 경쟁사 제품이 있긴 했지만 차별화 포인트가 명확했기에, 예산과 마케팅을 집중해 단숨에 용의 머리(큰 시장에서 1등)를 쳤습니다.
그러니 뱀의 머리는 원칙이 아니라 예산 배분의 결과입니다. 쓸 돈이 있으면 용의 머리가 낫죠.
물론 가장 베스트는 무조건 용의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한 상황이라면 사실 그 제품의 마케팅은 굉장히 쉬워지니까요.
그럼 내 상품은 어디에 있을까요. 용의 머리를 노릴 물건인지, 뱀의 머리로 충분한 물건인지는 감이 아니라 순서를 밟아 가려집니다. 순서는 이렇습니다.
2단계에서 대개 마음이 정해지는데, 등록 14만 3천 개짜리 화면을 직접 보시면 대개 마음을 접게 됩니다.
"그 시장에 이미
상품이 몇 개나 등록돼 있습니까?"
가고 싶은 시장부터 세어보시면 됩니다. 그 숫자가 광고비를 정합니다.
제일 가고 싶던 곳을 포기한 이야기였죠. 컨셉이 맞아떨어져도 안 갈 수 있고, 안 간 이유는 원칙이 아니라 그 제품에 쓸 돈이 얼마였는지였습니다.